조금 길지만 새해를 맞으면서 읽으면 마음을 새롭게 하는데 유익할 것 같네요^^

 

 

 

권지예/소설가

책상 앞에 세워둔 2013년의 탁상용 캘린더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새해를 맞은 지도 벌써 보름하고도 사흘째다. 어찌나 세월이 빠른지 등 떠밀려 맞이하는 ‘2013’이란 숫자가 아직은 어색하다. 날짜 밑의 칸이 하얗게 비어 있는 열두 장의 달력은 앞으로 펼쳐질 1년 간의 내 인생을 마음껏 그려보라고 주어진 흰 도화지 같다. 지나간 해의 달력처럼 날짜 칸에는 약속이나 원고 마감일, 기념일 등의 메모로 빼곡해질 것이다. 달력은 내 일상생활의 궤적을 기록한 비망록이다. 새 달력으로 바꾸면서 헌 달력을 보면 유난히 메모가 많은 달이 있다. 그럴 때면 참 바쁘게 살았구나 싶다.

그러나 명색이 작가인 나는 눈에 보이는 그런 바쁜 삶을 달력에 기록하기보다는 내 정신에서 일어나는 시간의 발효를 기록한 작품들을 와인 저장고에 갈무리하듯 쟁여놓고 싶은 바람이 크다. 일상의 시간과는 다른 축인 정신세계와의 시차를 극복하면서 살아야 할 운명인 작가는 두 개의 시계판이 달린 여행자용 시계를 차고 산다. 작품을 쓰기 위해 일상에 매몰된 시간에서 어느 순간, 튀어 오르는 물고기의 비늘처럼 반짝이는 순간을 낚아채길 기다린다. 일상적 시간에 각성을 주는 그런 시간의 경계를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나거나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어한다. 순간을 채집해 작품 속에 영원으로 박제하는 게 작가의 일상이고, 동시에 작품 안에서 살고 있는 작가는 시간을 정복하고 있다.

하지만 작가뿐 아니라 누구나 인간에게 똑같이 주어진 1년 365일이라는 물리적 시간을 엿가락처럼 늘이고 줄일 수 있다. 스티브 테일러라는 심리학자는 저서 ‘제 2의 시간’에서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나 시간의 주인으로 사는 법을 설파하고 있다. ‘제 2의 시간’이라는 심리적인 시간을 이해하면 삶의 속도와 내용을 조절할 수 있다. 시간의 상대성 이론이라고나 할까? 이런 이론에 앞서 사실 우리는 이미 경험을 통해 그것을 알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흐르고, 새로운 환경과 경험을 하면 시간이 천천히 마디게 흐른다. 그리고 몰입하면 시간이 금세 흘러간다.

세대마다 시간의 체감속도가 달라 20대에는 시속 20㎞로, 70대에는 70㎞로 흐른다는 말이 있다. 해가 갈수록 시간에 가속도가 붙는 것이다. 또한 해가 갈수록 새해를 맞이하는 설렘이 점점 줄어드는 것은 각자에게 주어진 1년이란 시간의 가치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10세 아이에게 주어진 1년은 인생의 10분의 1이지만, 60세 환갑 나이에 주어진 1년은 지나온 삶의 60분의 1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0세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살면 더 비중 있는 1년을 살 수 있다. 이런 삶의 태도라면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하다. 중요한 건, 얼마나 더 생기 있고 호기심 가득한 젊은이의 마음으로 인생이란 시간을 바라보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삶이라는 시간을 음미하고 오래 향유하고 싶다면 여행을 떠나거나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는 방법이 있다. 또, 고통스러운 시간을 잊기 위해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 생활이나 기쁨을 주는 일에 몰두하면 된다. 이런 시간의 법칙을 알고 그것을 잘 조절한다면 각자 자기 삶의 적정 속도를 찾아내 좀 더 편안하고 넉넉한 삶의 시간을 누릴 수 있지 않겠는가. 아깝게 요절한 천재들의 일생이 90세 천수(天壽)를 누린 일반인에 비해 짧은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도 없다. 안정 대신에 호기심과 자유로움으로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인 그들은 인생의 순간을 영원으로 인식하고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2013년. 우리에게 주어진 1년, 아니 주어진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생길이라는 게 누구에게나 늘 잘 닦인 길인 것은 아니다. 어느 땐 고속도로를, 어느 때는 비포장 산길을, 어느 때는 길도 없는 사막을 달려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시시때때로 인생길의 적정 속도를 잘 찾아내어 안전운전으로 완주하는 게 인간의 소임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올 초에 날아든 한 유명 야구선수의 비보와 그가 남긴 유서의 이런 문구를 보고 가슴이 먹먹했다.

‘행복한 날들 가슴 뿌듯했던 날들도 많았지만 더 이상은 버티기가 힘이 드네요. 불쌍한 우리 애기들…. 이 모자란 부모를 용서하지 말아라.’

인간의 삶이라는 게 정도 차이는 있지만, 누구에게든 가슴 뿌듯했던 날도 행복한 날도 있으며, 죽음을 생각할 만큼 고통스러운 날도 있다. 죽음의 순간이 한끝 차이이며 그 순간을 용케 넘기면 또 그럭저럭 삶의 새로운 국면이 펼쳐진다.

얼마 전에 한 친구의 아버지가 노환으로 돌아가셔서 문상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 친구의 아버지는 여러 번 사업에 실패하고 불우한 인생을 살아오셨다. 그런데 돌아가시고 나서 유품을 정리하던 중 30년 전, 자살 직전에 쓴 유서가 나왔다고 한다. 눈물자국으로 번진 잉크는 희미해지고 꼬깃꼬깃 접힌 자국이 역력한 30년 전의 유서는 손때가 묻어 나달나달해져 있었다. 자살로 생을 마감하지 않은 그의 아버지는 그 유서를 부적처럼 간직한 채 삶의 힘든 순간을 넘기며 제2의 인생인 여생을 조용히 보내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