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 부평구에 있는 전순금씨의 아담한 아파트.
그의 안방에 들어서면 직접 붓으로 써서 걸어 놓은 오언절구 한시(漢詩)가 눈에 띈다.

“성년부중래(盛年不重來)  일일난재신(一日難再晨)  급시당면려(及時當勉勵)   세월부대인(歲月不待人)”

‘명심보감’에도 소개된 중국 시인 도연명(365~427)의 시로,
‘젊은 시절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므로 때를 놓치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고 공부하라’는 의미다.

전씨는 올해로 84세.
어쩌면 이 시구의 의미를 누구보다 깊이 실감하고 있을 터.
그런 만큼 ‘하루에 아침을 두 번 맞을 수 없다’(일일난재신)는 마음으로 순간순간을 소중하게 보낸다. 그래서인지 생활에는 활기가 넘친다.

“누군가 내 나이를 묻지 않으면 그저 잊어버리고 살아요.
하루하루가 얼마나 바쁜지 동네 할머니들과 노닥거릴 시간도 없다니까요.”

서예는 내 운명.
5~6년 전 시작한 서예는 전순금씨의 뜨거운 학구열이 불타오르기 시작하는 출발점이었다.
전씨는 요즘 서예에 푹 빠져 있다.
70을 넘을 때 서울 종로 거리를 걷다 길가에 죽 늘어선 지필묵을 보고 옛날 오빠들이 붓글씨 쓰던 모습이 생각나 무조건 붓을 들었다.
그리고 5~6년 전 좋은 붓글씨 선생을 만나 체계적으로 배운 뒤 거의 해마다 부평구 노인복지회에서 여는 붓글씨 대회에서 상을 받고, 최근에는 한국서화작가협회가 주최한 제23회 한국서예예술대전에서 입선도 했다.

‘십 년은 붓을 들어야 이름 석자 정도 쓸 수 있다’며 부끄러워하지만 서예를 향한 열정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일주일에 두세 번 노인복지회관 서예교실에 나가 아침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줄곧 서서 글을 써도 그저 재미있기만 하다고.
게다가 전씨의 학구열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노래, 컴퓨터 등 기회만 되면 더 많이 배우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하다.
‘다음 생에 태어나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공부를 많이 하고 싶다”라고 말했다니 어느 정도인지 쉬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어쩌면 젊은 시절 어쩔 수 없이 공부의 꿈을 접어야 했던 아픔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제강점기 보통소학교에서 교편도 잡았다는 전씨는, 미혼 여성을 전쟁터에 강제로 끌고 가는 일본군의 횡포를 피하기 위해 남편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서둘러 결혼해야 했다.
그렇게 한(恨) 맺힌 삶은 지금 학구열 가득한 성년(盛年)으로 다시 태어났다.
전씨의 생활을 가만 들여다 보면 우리나라 노인문제를 모두 비켜 가는 것 같다.
특별히 병 때문에 괴로워하지도 않고, 경제적인 큰 어려움도 없다.
무엇보다 사막에서 홀로 지내는 듯한 황망하고 고독한 마음의 고통도 없고, 할 일이 없어 나날을 허무하게 보내는 일도 없다.
전씨는 지금 80대 인생을 금빛으로 빛내며 오늘도 힘차게 새로운 삶의 추억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