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백의 아들 울려버린 8旬 노모 ‘당부 편지’

[국민일보 2005-05-06 18:28]  

지난 3일 오전 취재를 위해 서울 강남경찰서 서장실에 들어서는 순간 손창완(51) 서장은 화들짝 놀라 무언가를 책상 밑으로 감췄다.

중요한 수사자료인가 싶어 “뭐기에 감추냐”고 캐묻자 “아무것도 아니야”라며 손사래치는 손 서장의 눈이 붉게 충혈돼 있었다. 한참을 실랑이하다 그가 마지못해 꺼내놓은 것은 여든을 훌쩍 넘긴 노모의 편지였다.

그는 “오전 6시쯤 출근 준비를 하는데 안방 문틈에 작은 메모지가 끼어 있어 펼쳐보니 어머니의 편지였다”고 했다. 새벽 같이 출근해 밤 늦게야 귀가하는 아들의 얼굴조차 보기 어렵자 어머니 김영애(86)씨가 평소 아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을 글로 적어 ‘출근 길목’에 놓아둔 것이다.

‘아들,내 말 좀 들어보소’라고 시작하는 편지는 비뚤비뚤한 글씨에 여기저기 맞춤법이 틀려 있었지만 5살 아이를 물가에 내놓은 듯 간절한 염려와 사랑이 구절구절 담겨 있었다. 환갑을 바라보는 아들이 외출할 때 “차 조심해라”고 하는 한국 어머니들의 마음을 그대로 옮겨놓은 글이었다.

어머니는 ‘걱정이 되어 하는 말이네. 이 새상(세상)은 좋흔(좋은) 것도 많이 있지마는 이름 모르는 병도 너무 많아 내 몸을 내가 조심하고 괄례(관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을 명심하게’라며 몇번이고 건강을 강조했다. 또 “절문(젊은) 나이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니라네. 아들도 오십이 넘어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라네. 요새 사람들은 좋다는 것은 다 먹고 좋다는 운동은 다 하는데 아들은 물논(물론) 시간도 없지마는 제발 몸 괄례(관리) 좀 하게’라고 당부했다. 편지는 ‘시간나는 대로 병원에 가서 혀랍(혈압)도 재보고 검사도 각금(가끔) 하면서 제발 내 몸을 내가 챙기고 괄례(관리) 좀 하란 말이네. 어미의 간절한 부탁이네”라고 끝을 맺었다.

손 서장은 “편지를 들고 집을 나서는데 어머니가 현관 앞까지 따라나와 ‘다른 사람 눈치도 봐야겠지만 건강도 챙겨라’라고 하셨다”며 “감정이 복받쳐서 ‘이제 일찍 들어오겠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출근 후 사무실에서 다시 편지를 꺼내 읽으며 눈시울을 붉히다 마침 방에 들어선 기자와 마주친 것이었다. 그는 “지난 2월 강남경찰서장에 부임한 뒤 어머니와 대면한 것은 밤 늦게 귀가해 어머니 방 문을 열고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성경을 보는 어머니께 ‘다녀왔습니다’라고 인사하는 게 전부였다”며 “시민 안전을 책임지는 경찰서장 아들도 어머니에겐 철부지로만 보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손 서장이 초등학교 6학년 때 남편을 여의고 농사를 지으며 8남매를 홀로 키웠다. 8남매 중 일곱째인 손 서장이 대학에 입학하자 서울로 이사해 식당일 등을 하며 자식들 뒷바라지를 했다. 눈이 어둡고 거동도 불편해 거의 외출을 못하게 된 7년 전부터는 집에서 성경을 베껴쓰며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다.

손 서장은 6일 어머니의 편지를 기사로 쓰겠다고 다시 찾아간 기자의 요청을 한사코 거절하다 마지못해 품에 넣고 다니던 편지를 꺼냈다. 그는 “어버이날에도 출근해야 하는데 그 날 만큼은 일찍 들어가 어머니와 저녁식사를 함께 하겠다”고 했다.

지호일기자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