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의 햇곡


언니 전화를 받고 생각난 김에 냉동실 문을 열었다.
비닐봉지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었다.
같은 것끼리 한데 모으려고 비닐봉지를 펼쳤더니
'핵곡'이라고 쓰인 종이가 들어 있었다.
녹두봉지 속에도 똑같은 글씨가 들어 있었다.
언니가 내 옆에 있었으면 꼭 안아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서툰 글씨가 자꾸만 언니의 얼굴과 겹쳐지고 있었다.
어깨 너머로 글자를 배운 것이 전부였던 언니.
내가 학교에서 '햇곡'이라는 글씨를 배우는 동안
언니는 '핵곡'이라고 배운 것이다.

'애야, 이거 맞게 썼지?'
언니가 보여준 종이에는 서툰 글씨로 '햇곡'이라고 쓰여 있었다.
언니는 요즘 노인대학에서 한글을 배우고 있다며
상기된 목소리로 자랑했다.
아픈 다리로 힘든 농사일을 하면서도
배운다는 즐거움에 빠진 언니의 모습은 더욱 활기차게 보였다.

- 박종금 수필, '언니의 핵곡' 중에서 -


어렵던 시절, 맏이라는 이유로, 딸이라는 이유로

배움에서 멀어진 경우가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안락하고 불편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해봅니다.


* 원전표기는 '핵곡'에서 핵의 받침이 ㄲ 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