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치자꽃 향기’ 펴낸 진효임 할머니

쓰고 맵고 달았던 그 세월, 詩가 되다

 

이름 석 자를 쓰면서도 진땀을 흘리던 평범한 할머니가 한글을 배우면서 일을 냈다. 사건(?)의 주인공은 지난 해 8월 시 69편을 모아 ‘치자꽃 향기’(아이테르)를 펴낸 진효임 할머니.
1941년 남원에서 6남매의 둘째로 태어난 할머니는 전쟁과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 4학년 때 학업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런 그가 일흔의 나이에 집 근처 노인복지회관에서 한글을 배우게 됐다. “초등학교 몇 년은 다녔으니 이름 석 자 쓰고, 읽는 것은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는데 쓰는 데는 영 자신이 없었지요. 처음 복지관에서 한글을 배운다고 했을 때 지금까지 이렇게 살았는데 새삼스럽게 무슨 공부냐고 지청구를 주는 친구도 있었지. 그런데 나는 살아 있을 때 하나라도 더 배우고 싶어 용기를 냈어요.”
어린 시절 어쩔 수 없이 학업을 포기해야 했지만 배움에 대한 열망은 늘 가슴에 품고 살았다는 할머니. 한글을 배우고, 또 인터넷을 배우면서 할머니의 일상에 즐거운 변화들이 일어났다. “인터넷으로 글도 쓰고, 이메일도 보낼 수 있고...신세계나 다름없었어요. 무엇보다 내 마음 속을 생각들을 직접 쓸 수 있다는 것이 제일 기뻤지요.” 일흔 나이에 다시 공부를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받아쓰기 시험에서 처음으로 100점을 받던 날, 할머니는 문방구에서 공책을 사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할머니의 쓰고, 맵고, 달았던 지난 세월들이 봇물 쏟아지듯 글로 표현됐고, 넋두리 하듯 써내려간 글이 3년 동안 100여 편이나 됐다.


 

 

-99세에 시집을 낸 일본의 시바다 도요를 보고 용기 내
“어느 날 막내딸이 내가 쓴 글들을 보고 이거 엄마가 쓴 것 맞느냐고 물어요. 막내동서도 형님이 정말 쓴 거냐고 하고...그래서 그렇다고 하니까 출판사 하는 셋째 딸이 엄마 한 번 이 글을 모아서 시집을 내보자고 하더군요.” 처음엔 나같이 배우지 못한 사람이 무슨 시집이냐고 손 사레를 쳤다. 그냥 마음속에 담아둔 말을 일기처럼 써내려간 것 뿐 인데 그런 글로 책을 낸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무엇보다 장성해 교사, 출판사 대표, 회사원으로 자리를 잡은 여섯 자식들과 손자들에 행여 할머니가 일흔에 한글을 익혔다는 사실로 누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컸다. 하지만 99세에 첫 시집을 낸 시바다 도요의 시를 읽고 용기를 냈다.
“한글을 몰라서 애들 키울 때 마음 아팠던 일이 많아요. 겨우 이름 석 자 정도 쓸 줄 아니 학교에서 무슨 서류를 써내라 할 때 제일 고역이었어요. 글을 배우니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쓸 수 있어서 참 좋아요. 나는 많이 배우지 못해서 긴 글을 못 써요. 그냥 살아가면서 느낀 것, 또 지난 세월들을 돌이켜보면서 짧게 써내려간 것뿐이지.”
그렇게 손녀에게서 물림(?)한 앉은뱅이책상 앞에서 쓴 글 들이 ‘치자꽃 향기’ 풍기는 시집으로 탄생했다. 왜 하필 치자 꽃이었을까? 치자 꽃은 여자들의 명약, 울화증을 속으로만 삭혀온 여자들의 화병을 낫게 한단다. 할머니에게도 치자 꽃은 일흔의 주름진 삶을 다독여주는 명약이었을까. 할머니의 ‘치자 꽃’이 잔잔하게 감동을 준다. ‘아무도 몰라주는 곳에서도/ 향기는 피어납니다/알싸한 그 향기/백설기처럼 흰 속살로 웃고 있습니다/7월 햇살로 피었다가 긴 장마 견뎌내고 지는 꽃/쓰고 맵고 달았던 세월이/아! 사랑입니다.

 

-문정희 등 유명 시인 작품과 함께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2012 우수문학도서’에 뽑혀
시집 ‘치자꽃 향기’에는 일흔의 일상, 부부, 사물의 표정, 나 어릴 적에, 고향생각, 엄마가 사랑한다 등 9개 주제로 짧지만 긴 여운을 주는 글들이 실려 있다.
인생 제 7막 3장, 7학년 3반. 하지만 할머니의 감성은 여느 시인 못지않다. 할머니의 그런 감성은 어쩌면 힘들고 속상한 일 많았던 지난날이 자양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어떻게 그 세월을 살아왔을까 싶지만 지나고 보니 참고 견디길 잘 했다 싶어요. 요즘 사람들은 조그만 일에도 참지 못하고 또 참는 것이 미련하다고들 하지만 참다보면  끝날 것 같지 않던 언덕길이 어느 순간 평지가 되어 있거든.”
18살에 시집온 할머니는 고향에서 남편과 소 농사로 잘 나가다 30여 년 전 소 값 파동이 일어나면서 빈털터리가 됐다고. 이후 6남매를 데리고 자리를 잡은 곳이 서울 양평동. 그때의 심경은 시 ‘엄마의 이름으로’에 아프게 담겨 있다.
“남편이 참 성실했어. 한 눈 한번 안 팔고 일 년이면 명절 며칠만 쉬고 열심히 일했어요. 나도 또 같이 열심히 일했고. 덕분에 아이들도 잘 자라주었고 이젠 부러울 것 없어요. 그런데 문득문득 지난 세월 내가 못했던 일들이 후회되고, 가슴 아픈 일들이 떠올라. 그럴 때 글을 쓰지요. 무엇보다 시어머니 생전에 잘해드리지 못한 게 가장 가슴 아파요. 젊었을 땐 시어머니가 나를 야단치는 것이 섭섭했는데 이 나이 되고 보니 그때 우리 어머니 심정이 이해가 돼. 친정엄마는 나를 낳아준 엄마, 어쩌면 친정엄마보다 더 오랜 세월 부대끼고 산 시어머니가 내 어머니 같은 생각이 들어요.”
행간마다 투박하지만 시부모님에 대한 마음, 남편에 대한 애틋함, 자식에 대한 사랑이 가득한 할머니의 시집은 예상외로 큰 반향을 일으키며 문화부 선정 ‘2012 우수문학도서’에 선정됐다. 지난 해 책이 발간되자마자 많은 매체에 소개되면서 유명세를 톡톡히 치렀다는 할머니는 이제 조용히 제 자리로 돌아와 글을 쓰는데 매진하고 싶다고 한다.
“마트 계산대에서 일하는 분이 내 시집을 짬짬이 읽으면서 용기를 낸다는 편지도 받고, 한글을 배우는 늦깎이 할머니, 다문화 학생들이 나를 보고 힘이 난다고 하고...보잘 것 없는 글에 힘을 얻는다고 하니 이 나이에 이런 기쁜 일도 다 하나님 사랑 덕분이지요.” 할머니의 꿈은 80세까지 3권의 시집을 내는 것. 세상의 모든 엄마들에게 힘찬 응원가가 되어줄 할머니의 시집, 벌써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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