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를 쓰는 내손이 너무나 예뻐 보여 뭐든 쓰고 싶어
한글날 특집 전국 성인문해교육 시화전 장려상 김해야학 엄금자 씨
2013년 10월 08일 (화) 16:08:45 호수:142호  1면 박현주 기자 phj@gimhaenews.co.kr

"난 어릴 때 / 동생들은 많고 집은 가난하여 / 학교를 못 가서 / 내 나이가 68세 되어 / 공부하려고 학교에 왔어요. // 한글을 배우니 기뻐서 / 밤에 잠을 안 자도 좋아 / 밥 안 먹어도 좋아 / 구름 위에 걷는 것 같아요. // 병원에서 용지에 / 내 주소 쓰는 내 손이 / 자랑스러워요. // 참 예쁘기도 하였어요."
 

   
 
김해야학 초등부 엄금자(70·내동) 할머니가 쓴 시 '예쁜 내 손'이다. 한글을 배운 후, 병원에서 내민 기록지에 처음으로 직접 주소를 쓰면서,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의 손이 너무 예뻐 보였다는 마음을 담았다. 이 시는 국가평생교육진흥원에서 주최한 '전국 성인문해교육 시화전' 대회에서 당당히 장려상을 받았다. '전국 성인문해교육 시화전'은 유네스코(국제연합 교육과학문화기구)가 문맹 퇴치를 위해 지정한 '세계 문해의 날(9월 8일)'을 즈음해 열리는 행사이다.
 
7남매 장녀로 태어나 엄마 노릇 도맡아
"학교 교실에 내 자리도 있었는데 …"
김해 큰아들네 온 뒤 야학 초등부 입학
"자꾸만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생각나"


엄 할머니는 강원도 영월에서 7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광부였고, 어머니는 장사를 다니면서 우리를 키웠지.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기도 했지만, 여섯이나 되는 동생들을 돌보고 업어 키우느라 학교를 못 갔어. 학교에 이름은 올라있었어. '솔치국민학교'. 교실에 내 자리도 있었는데, 학교 갈 상황이 아니었지. 종일 동생들을 돌보다가, 해질 무렵에는 장사 마치고 돌아오는 어머니가 드실 밥도 해야 했고…. 그래도 소풍날이나, 운동회날에는 학교에 갔어. 공부는 못했지만, 친구들도 있고, 그때가 제일 행복했지."
 
   
▲ 엄금자 할머니가 공부하는 기쁨을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적은 글. 김해야학 교사들이 틀린 글자를 고쳐준 흔적에 정이 뚝뚝 묻어난다.
김해 큰아들네로 온 지는 7년 여. 옆집의 한 젊은 사람이 '김해야학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졸업했다'고 말하는 걸 듣고, 직접 김해야학을 찾아갔다. 지난해 1월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집에서 혼자 한글을 배워보려고 했어. 며느리도 나한테 한글을 가르쳐주고, 내가 손주들한테 묻기도 했어. 그런데 집에서는 내 마음만큼 잘 안 되더라고. 한글을 모르는 심정이 어땠냐고? 답답하지. 눈 뜬 봉사라는 말이 있잖아. 딱 그 심정이지."
 
그는 김해야학 초등부에서 한글을 배웠다. 아직 쌍자음이나, 받침이 있는 글자는 어렵다며 손사래를 치지만, 할머니는 한글을 익힌 기쁨을 마음껏 누리고 있다.
 
"병원에서 용지를 주면서 뭘 기록하라는데, 거기 적힌 글자를 읽을 수 있었어. 이름란에 내 이름을 쓰고, 주소란에 우리집 주소를 쓰는데, 그게 얼마나 신기하고 좋던지. 손주를 데리고 학원에 등록하러 갔더니 또 용지를 주는 거야. 그 용지에 손주 이름 쓰고, 주소 쓰고…. 글을 읽을 줄 아는 내가 자랑스럽고, 글을 쓸 줄 아는 내 손이 얼마나 예쁘고 고마웠는지 몰라. 이제는 은행에 가서도 내가 직접 돈을 찾을 수 있어. 그래서 읽고 쓸 줄 아는 예쁜 내 손에 대한 시를 쓴 거야."
 
시뿐만이 아니다. 그는 친구들에게 편지도 쓰고, 가족과 손주들에게 생일축하카드도 쓴다. 그렇게 쓴 글을 손주들과 김해야학 교사들에게 보여주면 틀린 글자를 고쳐준다.
 
그의 필체는 놀라울 정도로 반듯하고 아름답다. 그는 한글을 예쁘게 쓰고 싶어 연구도 했단다. "언젠가 박정희 대통령이 글을 쓰는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봤는데, 세로 획은 힘있고 곧게 촥~ 내리긋는데 글자가 아주 예쁘고 멋있더라고, 그래서 그걸 따라하는 거야."
 
한참 이야기에 빠져 있던 그는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자꾸 방송이나 신문에서 찾아오는 거야?" 한글을 알지만, 시를 쓰는 사람이나 마음을 글로 표현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기자의 대답에, 그는 "자꾸 쓰고 싶은 이야기가 생각난다"고 말했다. "어릴 적 고향 영월에서 살던 이야기. 부모님과 우리 7남매가 살던 이야기를 글로 쓰고 싶어. 그리고 그 글로 영화를 한 편 찍었으면 하는 게 내 소원이야."
 
그는 신문이 나오면 강원도에 사는 여동생에게 보내야겠다며 기뻐했다. "혼자 이런 생각을 해봤어. 공부를 하니까 이렇게 좋구나, 글을 쓰니까 이렇게 자꾸 내가 알려지는구나 하고. 공부를 열심히, 잘 한 사람들이 유명한 이유를 이제 알겠다 하고. 그래서 학교 갈 시간에 학교 안 가고 엉뚱한 데서 놀고 있는, 교복 입은 학생들 보면 답답해. 세상에 공부만큼 재미있고 좋은 게 없는데, 그걸 모르다니…. "